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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글에서는 서현역 칼부림, 신림동 묻지마 살인의 이유를 사회적 문제의 차원에서 근본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현역 칼부림, 신림동 묻지마 살인

그리고 두 번째 글에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 사회적 원인이 승자와 패자,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와 같이 사회계층간 급나누기를 통해 패자를 양산하는 사회의 집단무의식에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서현역 칼부림, 신림동 묻지마 살인

이 세 번째 글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통해, 그리고 다른 나라의 사례를 통해 사회계층간 급나누기 하는 사회가 어떻게 조선 청년이나 최중원 청년과 같은 개인을 불행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보겠습니다. 

 

송강호는 왜 이선균을 죽였을까?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은 사회학과를 나왔습니다. 그는 영화를 통해 이런 사회적 현상을 담아내면서 이 사회의 계층간 갈등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운전기사였던 주인공 송강호가 부자집 사장님인 이선균을 죽인 이유를 의아해합니다. 영화 속에서 이선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자기 아들을 위해서 바보짓도 서슴치 않는 다정하고 성실하고 능력있는 아빠입니다. 다만, 지하층에 살던 송강호에게서 나는 습한 지하실 냄새를 싫어했을 뿐입니다.

 


그 지하실은 송강호가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가장 하층민의 삶을 상징합니다. 그러면 그 냄새는 무엇일까요? 하층민들에게서 보여지는 삶의 태도, 방식 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상류층 사람들이 보기에 한심하고 추하고 더러워보이고 역한 냄새가 나는 하층민들의 삶입니다.

 

그 냄새를 역해했던 사장은 운전기사였던 그에게 코를 막는 행동을 통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사는 삶은 정말 역겨워" 다시 말하면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너희들은 정말 역겨워" 라고 말하는 겁니다.

 

영화 속 운전기사였던 송강호는 사장이 주는 월급을 통해 살아갑니다. 그는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돈 주는 사람이고 너는 일하는 사람이야", "나는 승자, 너는 패자야", "나는 능력있는 사람이고, 너는 한심한 사람이야" 라고 하는 그 시선이었던 것입니다.

 

빈부의 벽

페루에는 '수치의 벽'이 있습니다.


높이 3M, 길이 10KM에 달하는 철조망이 쳐진 벽이 부자들이 사는 지역과 가난한 하층민들이 사는 지역을 막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180일 내로 이 벽을 허물라고 했지만 지자체에서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실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헌법 재판소에서는 왜 허물라고 판결했을까요?

이렇게 빈부를 나누는 것이 우리 모두가 가진 보편적 정의에 옳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들에게는 이 정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위한 자신들만의 정의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진자들의 그런 집단이기주의로 인해 빈민들은 루저로서의 패배감과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우리는 모두다 이런 시선을 갖고 있습니다.

즉, 우리 모두가 의식하지 않고 갖고 있는 보편적 시선, 집단 무의식입니다.

 

우리는 돈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을 통해 내가 조금이라도 더 우위에 서야 남들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신념을 주입받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이런 집단무의식으로 인해 33살 청년 조선, 22살 청년 최원종, 그리고 많은 살인예고를 통해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단 한 사람

물론, 100% 사회의 책임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똑같이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사회적으로 건강하게 성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는 하와이 카우아이 섬의 종단여구입니다. 1950년대 아주 가난하고 불행한 섬 사람들인 카우아이 섬의 아이들 중에서 가장 불행한 가정의 아이들을 30년 이상 연구한 결과 아무리 불우한 가정의 아이들이라도 '한 사람의 무조건적인 지지가 있으면 그 아이는 사회적으로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33살 청년 조선에게 단 한 사람의 무조건적인 지지와 수용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구였을까요?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그를 키워주었던 할머니였을 것입니다. 


"할머니가 왜 그렇게 사냐고 꾸짖어 순간 화가 났다"

 

그러나 범행 직전에 찾아갔던 할머니는 그에게 무조건적인 지지를 보내주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정말 결과는 달라졌을 수 있지 않을까요? 


결코 그 할머니를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할머니조차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는 집단무의식의 희생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와 우리 부모, 할머니 세대는 그렇게 살아가야만 한다고 배웠고, 그렇지 못할 때 꾸짖고 책망해주는 것이 옳다고 배웠습니다.

그것이 그 할머니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을 것입니다.

 


서현역 흉기 난동을 피웠던 01년생 최원종은 어땠을까요?
그가 특목고에 떨어졌을 때 그런 그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누구였을까요?
특목고에 떨어졌을 때 부모님들은 그에게 어떻게 말해주었을까요?

그는 자신이 루저라는 것을 누구를 통해 알게되었을까요?

 

그 부모의 탓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가 특목고에 떨어진 사람을 루저라고 바라보기 때문에 그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이 루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분들도 그냥 우리 사회의 집단 무의식의 희생자일 것입니다.

 


살인을 선택한 이유

33살 조선은 이런 사회적 불만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왜 아무 죄없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선택했을까요?

 

저의 모든 게 예전부터 너무 안좋은 상황에 있었던 게
제가 너무 잘못한 일인 것 같습니다.

저는 쓸모없는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는 살기 싫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자기는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가 한 범행은 사실 자기에 대한 사회적 자살입니다.
이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격리당하는 선택을 한 것이죠.

연세대 김주환 교수는 자기가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 자살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은 쓸모없는 사람, 가치없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그에게 소중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자기 자신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생명이 소중할 수 있을까요?

만약, 그가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절대 사회적 자살인 이런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럼 그가 쓸데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었을까요?
우리 사회는 부모도 없고, 가난하고, 못배우고, 직업도 없고, 성실하지도 못한 그에게 끊임없이 루저라고 주입시켜 주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그는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그의 사건을 들으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요?
그리고 지금도 그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나요?
이것이 우리가 가진 집단무의식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이런 사회에 대한 대책은 무엇일까요? 아니, 대책이 있기나 한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사회에 맞게 살아가야 하는 것 아닐까요?

 

다음 글에서는 이러한 사회문제에 대해서 사회학자들이 내놓은 해결책과 한계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현역 칼부림, 신림동 묻지마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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